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문단 편집) == 기타 == [[파일:external/dimg.donga.com/67193946.1.jpg]] 사고 차량 중 인양되는 파란색 [[기아 베스타]] 승합차에는 '''[[경찰의 날]]'''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경찰청 의무경찰|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교량을 통과하다가 상판 한복판에서 바닥째로 그대로 추락했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차량의 파손 없이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 차에 탄 의경들은 대부분 다치지 않았기에 사고 발생 후 헌신하여 다른 피해자들을 구조했다. 하지만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붕괴된 부분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가, 결국 거꾸로 뒤집어지면서 무너진 상판 아래로 추락하는 바람에 다수의 사망자가 생기고 말았다. 사고 발생 20주기를 맞아 [[JTBC 뉴스룸]]에서 이들 중 한 명과 [[https://www.youtube.com/watch?v=muJmd7Vi5qY&t=213s|인터뷰]]를 진행하였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 후 며칠 동안 경찰병원에 입원한 거 말고는 아무런 피해 보상이나 추가로 받은 치료가 없었다고 하며, 이들 역시 [[PTSD|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아직도 시달린다고 한다.[* 예컨대, 다리를 건너면 불안감을 느껴 빨리 지나가려고 하고 흔들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16번 시내버스의 처참한 내부를 목격했다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시의 소홀하기 짝이 없는 군인과 의경의 대우를 여실히 보여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Yczblw1fjYE|2021년 인터뷰]][* 위의 뉴스룸에서 인터뷰한 생존자와 동일인물이다.] 사고 초기 대응이 늦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94년 '''서울 한강 다리 한가운데가 뚝 끊어졌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이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사고'''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는 [[장난전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기에 장난전화를 하는 사람도 많았고, 접수 직원도 장난전화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붕괴 원인이 과도한 하중으로 인한 교량 구조물 피로였던 만큼, 한강 교량에 통행하는 차량을 대상으로 과적차량 단속이 체계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한강 교량을 비롯해 전국의 교량점검 또한 크게 이루어졌다. 사고 이후, 새로 지어진 성수대교는 사고의 여파로 인해 집중관리대상으로 분류되어서 철저히 점검받고 있다. [[http://www.boannews.com/media/view.asp?idx=8541&page=1622&kind=3|#]] >다리에 구멍이 났다는 제보로 나갔는데 무너진 상판 위로 버스가 추락해 있었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 할 말도 없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7시간 동안 중계차를 탔다. >---- >ㅡ 양찬승 기자[* 당시 현장에서 사고 소식을 전달하던 MBC 기자. 후에 양찬승 기자의 사연은 MBC의 다큐멘터리인 신 인간시대(1994년 10월 24일 방영)의 "현장에서"라는 에피소드에서 다루었다. 현재는 [[포항문화방송]] 사장 직을 역임하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사고가 나기 1년 전부터 한강 교량의 보수 및 관리가 매우 부실하여 붕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보도를 시리즈로 내보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 집중적으로 보도했던 부분은 교각 구조물 아랫부분의 침식 및 구조강성 약화 문제로서 성수대교 붕괴 원인의 직접적인 부분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교량 보수가 시급하다는 진단 및 붕괴의 위험성도 무척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서울시 당국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서울시는 안일한 대처와 반응을 보이기만 해, 고발적 성격으로 이들의 인터뷰를 뉴스에 보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당국은 이런 참사가 나기까지 교량의 위험성을 방치하였고, 참사 이후 MBC에서는 이 보도를 다시 방송해주면서 결국 서울시 당국은 붕괴 사고 책임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이걸 조사→취재→보도한 기자가 [[최일구]]이다.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어릴 때 집이 무너진 트라우마가 있어서 건물 부실에는 분노한다...는 식으로 밝힌 적이 있다.] 사고 이후로 서울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생의 학교 배정 최우선 원칙으로 '''절대 한강을 건너게 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교차배정(또는 타학군 배정)이라고 불렀다. 강남 8학군 학교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8학군이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통념이 형성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라, 다른 구에 살다가 자녀의 중고등학교 진학에 맞춰 강남구로 이사 오는 부모들이 워낙 많다 보니, 8학군 안에서도 모든 학생들을 다 진학시킬 수 없게 되었고, 할 수 없이 '''먼저 이사온 순서'''대로 끊어서 8학군에 배치한 후 남은 학생들은 가장 가까운 인접학군으로 배치하는 배정 방법이었다. 교차배정을 받은 학생들은 재배정 포기각서를 쓰지 않는 한 재배정 대상 목록에 올랐고, 8학군 중고등학교 안에 빈 자리가 생기면 그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사는 학생부터 재배정을 받았다. 반면, 8학군 출신 학생들은 대체로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이들을 교차배정받은 학교에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학생들에게 재배정 포기각서를 받아내려고 했다. 무학여고도 당시 성적 순위를 보면 학년 상위 20%는 강남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교차배정은 '''부작용'''도 많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16635|링크]]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강북 학생과 강남 학생들 간의 빈부격차가 컸고, 그로 인한 위화감이 문제가 되었다. 또 성적이 좋은 학생이나 학교 임원진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게 될 경우, 남아 있는 학생들이 느끼는 사기저하와 무력감 등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고, 강남 학생들의 잦은 전출으로 인해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며, 일부 학교는 강남 학생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강남 출신 학생들만 따로 모아 특별반을 만들어 우대해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타 지역에는 큰 강을 건너지 않게 한다는 조항이 없는 듯 하다. 부산을 예로 들면 학군에 따라 [[낙동강]]과 [[서낙동강]]을 건너는 학생들이 많이 있으며, [[평강천]]으로 인해 학군이 갈려서 심지어 명지도는 사하구, 원도심과 같은 서부학군 내, 대저도는 북구, 사상구와 같은 북부학군 내에 있다. 맥도는 북부학군에 속하지만 지리적 이유로 서부학군으로 교차배정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조항이 새로 생겨 거의 1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가 사라졌다.[* 2010학년도부터 고교 선택제가 시행되면서 공식 폐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249353|#]] 단 이전부터 성동구 지역에 사는 학생 일부가 강남의 압구정고나 현대고로 배정되기도 했다. 이는 성동구 일부 지역의 고등학교 부족 문제에 근거하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전에 행한 배정방식과는 방향이 반대이다.] 여기서 사망한 학생들은 이후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사망한 무학여고 학생들 중에는 [[일원동]]과 [[수서동]] 출신들이 많았다. 일원·수서동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1992~1994년에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일원동과 수서동에 지하철이 들어온 것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장구간이 개통된 1993년 10월 30일이었다.] 이 때 이사 온 학생들의 경우, 거주 기간 부족으로 인해 강남 지역의 고등학교로 배정받지 못하고, 한강 건너의 무학여고로 배정받은 것. 당시 일원·수서지구 학생들의 타학군 배정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http://m.segye.com/view/19930107000081|「수서입주 고교진학생 전원 타학군 배정 물의」]] 세계일보 1993-01-07, [[http://m.segye.com/view/19921012000057|「2만여가구 입주 수서지구 고교진학생 타학군 배정 불가피」]] 세계일보 1992-10-12 등 참고.] 대단위 신설 아파트 지역 학생들이 전원 타학군으로 배정되는 것은 유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시 서울시 교육청은 일원·수서지구를 특수 학군화하여 해당지역 학생들을 거주 기간에 관계없이 당시 일원 지구 내에 개교 예정이었던 중산고등학교나 이들 지역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송파구]]의 잠실여고, 가락고 등으로 배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강남 지역 학생들과의 형평성, 송파 지역 학부모들의 반발 등이 문제되자, 결국 일원·수서지구 학생들 역시 동일하게 거주기간제를 적용해, 최종적으로 이들 역시 통학시간만 1시간이 넘는 타 학군 학교로 배정하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8학군 고등학교의 과열현상으로 인해, 코 앞의 학교를 두고 먼 거리를 통학해야만 했던 것도 안타까운데, 결국 이런 일까지 일어나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사고 이후 [[강남구]]에서 무학여고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불편을 겪자, 당시 서울시 교육청 측에서는 강남 일대와 [[선릉역]], [[삼성역(도시철도)|삼성역]]을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무학여고 측에서는 [[왕십리역]]과 무학여고를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http://www.hankyung.com/society/article/1994110100031|무학,한양여고 학생 24명,내년 강남 재배정..성수대교 관련]], [[http://www.joongang.co.kr/article/2972470|성수대교 붕괴 그후 한달-무학여고]]] 사망자 32명 중에는 [[필리핀]] 국적의 외국인도 1명 포함되어 있었다. 제일 많은 인명피해가 난 한성운수 소속 16번 버스 기사였던 유모 씨[* [[1948년]]생. 두 딸과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부인 이모 씨를 두었으며, 생전에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https://www.82cook.com/entiz/read.php?num=2210398|#]]]도 목숨을 잃었는데, 유 씨는 원래 [[전세버스]] 기사로 근무했었으나, 그 후 전세버스 기사를 그만 둔 뒤, 1992년부터 한성운수 번동 본사로 이직한 이후, 전세버스 기사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전향했으며, 1992년에 29번(번동-무학여고-성수대교-고속터미널-방배동, [[서울 버스 148|현 간선 148번]]) 노선을 운행했다가, 1년 뒤인 1993년부터 이듬해 붕괴 사고 직전까지 16번 노선에서 운행했었다. 16번 버스 기사 유 씨의 부인인 이모 씨는[* 버스 기사 유 씨의 부인이자 유족인 이 씨도 2004년 당시 유가족들이 대형 참사 이후 [[PTSD]]를 다룬 모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남편 유모 씨를 잃은 후, 이 씨의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사고 소식을 듣고 남편 유 씨를 잃은 충격에 세상을 떠났고, [[PTSD]]를 앓고 있다고 오열하면서 인터뷰를 했다.] "남편이 새벽에 일 하러 나갈 때 춥다며 옷을 두껍게 입고 나갔다"[* 참고로 16번 버스를 운전했던 버스 기사 유 씨는 원래 붕괴 사고 당일에는 휴무였다고 한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infra&no=101961|(다섯 번째 댓글 참조)]]]라며 "그 때 속옷까지 갈아 입혔는데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라며 몸부림을 치면서 오열했고, 같은 회사의 동료 버스 기사인 김모 씨는 "유 씨가 계속 29번 버스를 운행해 왔다면 이런 끔찍한 사고가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24672|관련 기사 1]][[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2200209128006&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10-22&officeId=00020&pageNo=28&printNo=22663&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2]] 당시 [[한성운수(서울)|한성운수]] 버스기사들은 '유 씨가 동료기사들을 대신해 희생한 것으로 생각한다' 며 안타까워했다. [[https://www.kinds.or.kr/v2/news/newsDetailView.do?newsId=01100501.19941023015622101|링크]] 이 사고로 무학여고에 다니던 딸을 잃은 아버지 장모 씨는 사고 5년 후인 1999년 8월 18일 성수대교 북단에 건립된 희생영령 위령비[* 1997년에 세워졌으며,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https://futureheritage.seoul.go.kr/web/investigate/aroundHeritageView.do?htId=462|선정되었다]].] 앞에서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 딸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 사연은 [[조관우]]의 실락원이라는 곡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후술할 실락원 뮤직비디오도 해당 사연을 모티브로 찍은 것.] 참고로 이 위령비의 정확한 위치는 [[한남로]] 방면 [[강변북로]] 진/출입로 쪽인데, 위령비와 주차장 사이는 자동차 도로로 막혀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을 뿐더러, 횡단보도나 보행자 신호등 같은 안전시설도 없고, 위령비 주차장도 화단으로 막혀 있어 진입로를 지나칠 수 있다. 더군다나 위령비를 관리하던 공무원조차도 현재는 모두 퇴직한 상황이라, 제대로 관리조차도 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8&aid=0002988493|#]][* 그 근방에 [[서울숲]]이 있다. 유사 사례로는 1982~2014년까지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돈내코에 방치됐던 [[남영호 침몰사고|남영호 참사]] 위령탑이 있었다.] 만약 이 사고가 21세기에 일어났다면, 희생자들과 관계된 사람들이 심리치료를 받는 등 후속조치가 곧바로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그런 식의 개념 자체가 잘 없었고, PTSD란 개념 자체도 생소했다. 특히 지금도 그렇지만, 미성년자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좋지 않은 시대였다. 그래서 큰 사고로 많은 희생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무학여고 학생들은 바로 다음날 아침 추모식을 잠깐 가진 뒤, 곧바로 정상수업에 들어갔고, 공적으로 어떠한 심리적인 치료나 상담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 이 사고가 당시 수능 시험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일어난 사고였기 때문에 당시 3학년 희생자와 같은 반에 있던 학생들이 특히 여파가 컸다고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48539|링크]] 당시 학교로 등교하던 딸을 참사로 잃은 어느 아버지를 참사 당일 [[MBC]]에서 취재를 했는데[* 당시 취재했던 기자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제21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경기도지사 지방선거에 나왔던 '''[[김은혜]]'''다.], 당국의 무관심과 무책임한 대처에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찬 아버지의 인터뷰 내용이 꽤 섬뜩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pLlwARt0jE|#]] >'''[[안전불감증|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올 수 없다고 장담 못 해요! 미리미리 방지를 해줬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냐 이거야...]]''' 이러한 참상들은 이틀 뒤 발생한 납북 국군포로 [[조창호]] 탈북으로 서서히 잊혀가는 듯했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 이후에 이보다 인명피해 규모가 훨씬 큰 참사(대형사고)들이 잇따라 속출했다. 2007년 [[미국]]에서 [[미시시피 강 교량 붕괴 사고]]가, 2018년 [[이탈리아]]에서 [[제노바 모란디 교량 붕괴 사고]]가, 2019년 [[대만]]에서도 [[난팡아오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서울시 시내버스는 일부 잔존했던 1988년 이전 출고분으로 해당 사고 차량의 도색과 동일한 보라돌이 색[* KD의 보라색은 이 사고 이후인 1996년에 대원관광을 시작으로 적용한 도색이며, 시외 / 고속부는 이듬해인 1997년에 처음으로 적용하였고, 5톤색[* KD운송그룹 시외버스 도색이 단색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톤이 5가지이다.]이라 보라색+흰색 투톤인 당시 도색과는 무관하다. 해당 도색은 1985년 3월부터 도입된 도색으로 당시 노선별 적/청색 정류장 분리 정차 제도에 따라 제정된 도색이다.[* 단, 나머지 30%의 도심 구간 입석 버스와 외곽 구간만 운행하는 입석버스는 이듬해 1986년 8월까지 마린블루 도색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보라색을 음산하게 여겼던 반응 등으로, 도입 3년 만에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4개월 전인 1988년 5월부터 밝은 색 계통의 4종 파스텔톤 도색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도색 유지 보수가 간편하고 파스텔톤 도색이 기존 보라색 도색보다 때가 잘 탄다는 단점이 있어, 운수 사에서는 나름 선호한 바 있었고, 1988년 이후에 출고한 차량임에도 일부러 재도색 하는 일도 있었다. 사고를 당한 해당 차량의 도색도 같은 케이스.]이 적용된 차량들도 사고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는 일부 반응에 1995년 냉방화를 전후로 대부분 재도색을 거치거나 일부는 조기대차되기도 했다. 특히 사고 버스 업체였던 한성운수도 1/3이 보라돌이색이였는데, 두말 할거 없이 해당 도색을 '''전부 없앴다.'''[* 당시 사고 차량에 적용된 도색은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전에도 1988년 4월 1일 사망자 19명이 발생한 [[천호대교 버스 추락 사고]]의 사고차량에도 적용된 도색이었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사고 당시를 떠올리는 등 꺼림칙한 느낌이 들 수도 있었다. 이 사고 이후 사고 차량과 동종 차종인 BS105L을 운행하는 업체들은 BS105L만큼은 1988년 이전 출고분이라도 밝은색 4종 파스텔톤 도색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재도색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PTSD]] 항목과 재개통한 성수대교의 도장이 기존의 하늘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뀐 점, 무엇보다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때 207계의 후속으로 도입 예정이었던 321계 전동차뿐만 아니라 동종 차량인 207계의 도색을 전부 바꾼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 후반에는 [[1988 서울올림픽]]에 맞춰 도입되었던 4종 파스텔톤 도색과 냉방화에 맞춰 도입된 몬드리안 도색차량만 공존하게 되었다. 참사가 일어난 직후인 1994년 11월 10일에 [[북한]]은 정오에 '중대방송'을 내보내자 정부에서 긴장이 엄청났는데, 느닷없이 [[김정일]]이 청류대교 2단계 공사를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일부에서는 성수대교 사고를 이용해 남한을 조롱하고자 하는 북한의 심리전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11000209129007&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11-10&officeId=00020&pageNo=29&printNo=22680&publishType=00010|동아일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11000289104010&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11-10&officeId=00028&pageNo=4&printNo=2062&publishType=00010|한겨레]] 이 다리를 지은 동아건설은 1990년대 당시 건설사들이 그랬듯이, 해외 공사 수주와 한국의 부동산 붐 등으로 잘 나갔고, [[동아그룹]]의 모기업이란 메리트가 있었다. 그러나 해외 공사에 치우친 탓에 한국에선 아파트 신축하는 경쟁사들과 달리, [[재개발]] 및 [[재건축]]밖에 못 땄고, 막대한 이주비용 때문에 제2금융권으로부터 단기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이렇게 회사 내부부터 어지러운 통에 해당 사고로 신뢰도가 쓰레기통에 처박히자 동아건설은 큰 타격을 입고,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1998년에 최원석 회장이 물러나고 워크아웃을 겪다가, 2000년에 부도맞고 그룹이 해체되었다. 이때 동아그룹의 계열사 중 [[CJ대한통운|대한통운]]이 있었다. 대한통운은 본디 국영기업이었지만, 민영화하며 동아그룹이 인수해서 회생에 성공했는데, 외환위기 여파로 2000년에 독립했으나, 모기업의 부도 여파로 채권단이 관리했고, 2008년부터 [[금호아시아나그룹]]에 팔리더니 [[CJ그룹]]으로 갔다. 반면 동아건설은 2001년 파산 이후 2007년부터 프라임개발을 거쳐 [[SM그룹]] 계열사가 됐다. 포털에서 '성수대교 붕괴' 검색어를 이용해 오래된 기사 순으로 검색하면, 그 당시 연합통신(現 [[연합뉴스]])에서 출고된 기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고현장의 시간별 상황이나 피해자 구조·치료 현황, 자원봉사 현황, 사고 원인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의 분위기를 다룬 스케치 기사, 사고 직후 PC통신에 올라온 글들도 기사화했다. 기사가 올라온 시각을 보면서 읽다 보면 당시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수대교와 가까운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며 친구들이 난리를 치기에 사고 현장을 멀리서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 시사평론가 [[김용민(1974)|김용민]]은 성수대교 사고 당시 대학생 신분의 [[극동방송]] 리포터였는데, 등교 중 성수대교 근처를 지나다 붕괴를 목격했고, 인근 시멘트 회사로 달려가 전화를 빌려 회사에 보고한 뒤, 갖고 있던 녹음기와 공중전화를 통해 현장 상황을 생중계했다. 이후 극동방송 PD로 입사했다. [[윤종신]]은 곡 작업을 끝내고 사고가 일어나기 15분 전에 성수대교를 건넜는데, 붕괴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https://www.fnnews.com/news/202106140942008076|#]] 사고가 일어난 [[1994년]] [[10월 21일]]은 전체적으로 따뜻했던 당시 10월 중 유독 유일하게 기온이 낮았다고 한다. 최고기온부터 '''10.4℃'''에 불과했다. [youtube(BDpFSkdLvJ0)] [[모닝와이드|출발! 서울의 아침]]의 타이틀로 방영한 마지막 날이 바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일이다. 이 사고 이틀 후 [[LG 트윈스]]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다.[* 사고 당일은 비로 인해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